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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空空)의 시선

인상 깊은곳/고택,고건축물

( 고령여행 ) 죽유종택,매림서원,고령 지산리 당간지주

空空(공공) 2018. 4. 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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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은 2015년 8월에 고령 향교,산림 녹화 기념숲

대가야박물관을 한번 다녀왔었다

개실마을 본 김에 그때 보지 못했던 고령 여기저기를

둘러 보고 가기로 했다

 

지도에서 개실마을에서 가까운곳을 찾아 보니 죽유종택이

눈에 띈다

* 죽유 종택 (경북 기념물 제139호 )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이자 의병장이었던 죽유 오운(吳澐)(1540∼1617)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이 지은 살림집이다. 오운은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곽재우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으며, 개인 문집인 『죽유문집』과 조선 중기 남인의 역사인식이 반영된 대표적인 역사서인 『동사찬요』를 쓰기도 하였다. 

죽유종택은 오운의 후손이 1700년대 말에 지어 죽유 오운을 기리고자 집의 이름을 죽유구택이라 하였다. 그 후 1906년에 고쳐 지었으나 1920년 대홍수로 이곳에 옮겨 왔다. 이때 사랑채만이 그대로 옮겨 왔고 안채를 비롯한 나머지 건물들은 새로 지은 것인데 특히 오운의 위패를 모신 사당은 1953년 경에 새로 지었다. 특히 이 죽유종택은 고령지역 3.1운동의 본거지였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노동당 사무실로 쓰이는 등의 역사적 애환을 가진 곳이다.

송림리 마을 안쪽의 야트막한 야산 어귀에 남향하고 있는 종택 건물의 배치는 크게 안채를 비롯한 정침공간과 사당이 있는 제사공간으로 나뉜다. 정침공간에는 사랑채와 중사랑채, 유물관, 안태가 각각의 건물로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채 동쪽 경사진 곳에 목판을 보관하는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1906년에 지어진 사랑채는 이 종택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보이며, 앞면 4칸 가운데 오른쪽 2칸은 반칸 정도를 물려 툇마루를 형성한 후 온돌방으로 하였고, 나머지 2칸은 대청으로 하였다. 뒤쪽에 1m 정도를 더 내어 온돌방 뒤편은 벽장으로 사용하였는데, 특이한 것은 대청 뒤쪽도 골방으로 꾸민 것이다. 별도의 장식을 하지 않아 소박하지만 건실한 부재를 사용하여 중후한 느낌을 준다. 유물관에는 고문서류 7종 110매와 전적류 7종 12책(보물 제1203호)이 보관되어 있다. 

죽유종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오운의 학문적 자취와 임진왜란 당시 그의 나라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곳이며 한말 계몽기와 일제시대에 민족의식을 깨우치기 위한 교육의 산실로서 활용되는 한편 고령지방 3.1운동의 발원지로서 그 의의가 있다

                                                         ( 문화재청 누리집에서 인용 )

 

죽유 종택에도 후손이거주하고 계신다.그래서 안은 보지 못했다

옆에는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었다

바로 근처에 매림 서원이 있었으나 역시 문이 잠겨 있어 밖에서만 보았다

* 매림서원

 서원은 곽수강(郭壽岡)과 오선기(吳善基)를 추모하여 유림에서 1707년(숙종33)에 건립하였다. 1868(고종 5)에 서원훼철령에 의해 훼철되고 매림재(梅林齋)로 존속하였다. 1985년 현풍곽씨와 고창오씨 양 문중의 후손들이 중수하면서 서원이 복원되었다. 매년 3월 중정(中丁)에 두 배향인의 향사를 지내고 있다. 최근 입구확장 및 담장설치 공사를 하였다.

                                                                 ( 대한민국 구석구석에서 인용)

 

찾아 오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눈만 멀뚱거리는 녀석..삽살개 같기도 하고 사자견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기가 겁이 나긴 났다

지난번 고령 방문시 놓친 당간 지주는 꼭 보고 가야 했다

당간지주 포스팅은 이번이 3번째인데 보물은 처음이다

고령 지산리 당간지주 ( 보물 제 54호 )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워두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 두게 되는데 이 깃발을 걸어두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드물게 당간이 남아 있으나, 대부분은 당간을 받쳐주던 두 기둥만 남아 있다. 

마을로 변해버린 절터에 세워져 있는 이 당간지주는 동서쪽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안쪽 면에는 아무런 조각을 두지 않고, 바깥쪽 면에 양 모서리를 줄인 후 가장자리와 가운데에 세로띠를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는데 그 모습이 장식적이고 화려하다. 앞뒤 두 면은 윗부분에 안상(眼象)모양으로 움푹 들어가게 새겨 놓았다. 꼭대기는 바깥으로 내려오면서 둥글게 깎여져 있으며, 3단으로 굴곡을 두었다. 안쪽 면의 아래위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2개의 홈을 파놓았는데, 직사각형의 모습이다. 현재 아래부분은 묻혀 있어 받침의 모습을 알 수 없다.

단아한 조각솜씨와 그 수법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중기인 8세기쯤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지난번 못간 우륵박물관을 관람하기 위해 발길을 돌린다